01첫 번째 기억, 바람과 온기
내 삶은 구리인지 남양주인지 모를 어느 흙길 위에서 아스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날의 기억은 소슬한 바람 같기도 하고, 정겨운 흙내음 같기도 합니다. 나는 수줍음이 많아 남의 그늘 뒤로 숨기 바빴던 아이였습니다. 정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내 유년의 쓸쓸한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나를 사랑으로 키워냈던 할머니의 웃음이었고, 어린 동생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던 언니의 온기, 그리고 넓은 마음으로 나를 보듬어준 고모들의 아늑한 품이었습니다.
노원과 하남 등 이곳저곳 터전을 옮겨 다니며 계절을 거치는 동안, 내면에 잠들어 있던 맑은 에너지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활달한 동무들과 떼 지어 구르며 스스로를 깨웠고, 수줍던 작은 아이는 어느덧 세상을 향해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어릴 적 마주했던 삶의 그늘은 나를 무너뜨리지 못했고, 세상을 가슴으로 품어낼 단단한 자양분이 되어주었습니다.
02교단 위의 사명감과 무대 위의 낭만
젊은 날의 나는 뜨겁고 아름다웠습니다. 무대 위에서 경쾌하게 리듬을 타며 춤을 추던 낭만적인 춤꾼이었고, 음률에 마음을 열 줄 아는 흥이 넘치는 청춘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열정은 이내 아이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교단으로 이어졌습니다.
칠판 앞에 서서 국어를 가르치고, 교실 안의 수많은 숨소리를 품어 내던 시간들.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가며 장학사로, 고등학교장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책무를 짊어졌습니다. 거창한 명예나 거위털처럼 부풀린 포장보다는 한 명의 정직한 교육자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세상의 무게에 흔들리는 까까머리 제자에게 "인생은 견뎌내는 것이다, 버티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교육에 헌신하며 경쾌하게 춤을 추던 그 자유로운 영혼은, 다른 이들과 다른 특별한 나만의 색이었습니다.
03마음을 헤아리는 일, 삶을 버텨낸 힘
살아온 길 위에 어찌 거친 풍랑과 고단함이 없었겠습니까. 가족의 보살핌 없이 홀로 견뎌내야 했던 유년 시절의 외로움, 아비의 고단한 어깨를 바라보며 절제해야 했던 눈물, 그리고 삶의 고비마다 찾아왔던 크고 작은 슬픔들. 그러나 그 모든 시련 앞에서도 결코 환경을 탓하거나 손을 놓아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긴긴 세월을 버텨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타인의 입장에 묵묵히 서서 그 아픔을 먼저 헤아려주는 마음, 상대의 버거운 짐을 가만히 바라보며 염려해 주는 다정한 손길. 나에게 사랑이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들어주고 아껴주는 지극한 애정' 그 자체였습니다. 견뎌내야 하는 모든 고단한 순간마다 포기하지 않고 가슴속 깊이 지켜낸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단단한 씨앗이었습니다.
쌀알 한 톨의 소소한 단맛에 행복해하고, 흥겨운 음악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길 줄 아는 천진난만함. 힘겨운 일상 속에서도 소소한 재미를 찾아내어 주변을 밝히려 노력했던 내 맑은 웃음이 나의 가족과 제자들, 그리고 이 삶에서 인연을 맺은 여러분 모두의 가슴속에 작은 온기로 남기를 바랍니다.
04참 좋은 순간들, 그리고 안녕
내 인생을 주욱 돌아보니 나는 참으로 아름답고 치열하게 나의 계절들을 완성해 왔습니다.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버드나무처럼 단단하게 삶을 지켜냈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다정한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